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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찾아올 봄을 맞기 위한 잔치, 겨울나기 ”
사계 중 유일하게 ‘계절나기’가 있는 겨울 겨울이 힘겨운 까닭은 무엇보다 날씨가 추워서 활동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농경민이었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시식하는 소채류의 농산물도 여타 계절처럼 싱싱한 생 것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도 원인이 된다. 물론 겨울철에도 소채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여름철에 싱싱하게 먹던 소채류도 대개는 호박고지, 가지고지, 시래기 등처럼 겨울용 진채陣菜류로 바꾼다. 같은 김치라도 ‘김장김치’는 양념을 다양하게 하여 깊은 맛을 내게 한다. 사실상 전통적인 생활방식으로 살 때의 겨울나기란 그리 수월하지 않았다. 우선 칼날 같은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난방이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난방이 이루어지지만 전통사회에서 대표적인 난방 방법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구들장을 덥혀 온돌방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었다. 외풍外風이나 한기寒氣는 문풍지나 휘장(커튼) 같은 것으로 막았다. 화로도 난방 기구였지만 이는 주로 낮에 이용했는데, 이는 난방으로 뿐 아니라 즉석에서 밤이나 떡을 구워 먹는 오늘날의 ‘가스연료’ 기능까지 했다. 가족, 친지와 둘러앉아 화롯불에 밤, 인절미 등을 구워 먹으며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겨울나기의 낙樂이며 운치였다. 겨울 채비는 늦은 가을부터 시작된다. 난방용 장작도 수북하게 쌓아 놓고 우리 음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김장을 입동立冬 전후에 했으며 진채식 재료인 시래기를 비롯한 온갖 소채류도 다양하게 마련한다. 이제 찹쌀로 만든 떡과 찰밥이 제 맛을 내며, 여름 음식인 보리밥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때가 된 것이다. 얄팍했던 무명옷은 장롱으로 들어가고 어느새 목화솜을 두둑하게 넣은 솜옷과 솜이불이 우리 몸을 보온해주기 위해 등장한다. 목화와 같은 식물성 섬유의 보온 방법 이외에 털옷도 있었지만 서민들은 주로 목화솜으로 방한을 했다. 칼바람에 매섭게 찬 날씨지만, 그렇다고 움츠러 들지 않는다. 아이들은 눈이 오면 눈싸움을 즐기고 썰매타기, 자치기 등 온갖 놀이로 몸을 훈훈하게 한다. 오히려 무더운 여름철보다 겨울철에 더욱 활발하게 뛰어노는데 이는 아이들의 겨울나기 방식이었다. 물론 어른들도 놀이를 겸한 운동을 한다. 산에 나무하러 가서 장치기로 추위를 달랬고 사냥도 겨울 스포츠의 하나였다. 음력 12월, 섣달은 납월臘月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납臘은 수렵(狩獵, 사냥)과 무관하지 않다. 동지 후 세 번째 미일未日을 납일이라 하여 나라에서는 종묘와 사직에 납향제臘享祭라는 큰 제사를 지냈다. 이때에는 멧돼지와 산토끼를 썼으니 이는 포수가 사냥하여 바친 것이다. 납향에 쓰는 산짐승고기를 납육臘肉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섣달그믐 하루 전이나 이틀 전에는 소 잡는 일을 금하는 우금牛禁 정책을 완화했다. 항간에서는 아이들이 참새고기를 먹으면 마마(천연두)를 잘 넘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물을 치거나 활을 쏘아 새를 잡았고, 나라에서 총을 쏘아 잡는 것도 허락했다. 추운 계절에 아이들에게 새고기로 영양을 보충하여 겨울을 건강하게 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잊게 하는 참 겨울은 음력 시월(10월)부터 섣달까지이다. 날씨는 동짓달보다 섣달이 춥고 심지어 봄이 시작된다는 정월이 더 추울 수 있지만 기후가 아닌 24절기로 계절을 가늠하기도 한다. 겨울에 해당되는 절기는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이다. 그런데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절기가 우리나라 기후에 꼭 맞는 것은 아니다. 그 원인은 24절기의 이름이 원래 중국 주(周, BC 12~249) 왕조가 득세할 때 화북華北의 기상상태를 기준으로 붙인 탓이다. 그야 어떻든 동지가 지나면 막연히나마 봄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를 기점으로 낮이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서양에서는 태양의 부활로 보아 동지를 상서롭게 여겼다. 크리스마스는 원래 동지를 기준으로 정한 날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이면 한 번쯤 생각나는 조선조의 명기 황진이가 지은 시조다. 황진이는 당대의 인물인 부운거사 김경원을 첫사랑으로, 화담 서경덕, 그리고 당대의 명창 이사종과 사랑을 나누었다. 마지막 연인이었던 이사종과 헤어진 후 삭풍이 휘몰아치는 엄동설한 긴긴 밤이면 이사종을 그리는 마음에 그 옛날 부운거사 김경원을 사모하며 읊었던 시조를 새삼스레 떠올렸다고 한다. 황진이처럼 님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동짓달과 섣달 밤은 지루할 정도로 길어 때로는 상념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면 어느새 시장기를 느껴 배가 출출하다. 이러한 밤을 메워주는 것이 참站이다. 참은 일을 하다가 쉬는 짬을 말하는가 하면 그 짬에 먹는 음식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밤참은 밤에 먹는 음식, 밤에 일을 하지 않더라도 짬이 나기에 참을 먹으며 긴 밤을 ‘줄이는’ 것이다. 전에 밤이 되면 서울의 골목에서는 “차압싸알 떠억(찹쌀떡)…”하는 소리와 “메밀묵”하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왔다. 아쉽게도 여기 찹쌀떡은 우리 인절미가 아니라 일본식 찹쌀떡인 ‘모찌’였지만 기나긴 밤을 메워주는 맛을 냈다. 때로는 특산물도 등장하여 대게가 유명한 경북 영덕지역에서는 참으로 파는 것이 게였다고 한다. 요즘 계절이 달리 없이 즐긴다는 야식夜食은 예전의 ‘밤참’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또한 여름에 논밭 일을 하다가 잠시 쉬며 그곳에서 먹는 참과도 다르다. 여름 참은 때로는 점심식사의 의미가 있지만 겨울밤의 참은 그야말로 ‘간식’이었으며 겨울나기의 한 방식이기도 했다. 달래, 냉이 그리울 때 동지, 섣달은 물론 봄이 시작되는 정월에도 칼바람이 불고 날씨는 여전히 차갑다. 심지어 음력 2월, 그러니까 양력 3월에는 꽃샘, 잎샘 추위가 한기寒氣를 느끼게 하니 날씨로 계절을 가늠한다면 봄은 멀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네 입맛은 왜 그리 예민한지, 이미 동지를 지나 섣달에 들어서면 느닷없이 산뜻한 달래와 냉이 향이 그리워진다. 곧 봄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겨울은 많은 준비가 필요한 참으로 힘겨운 계절이다. 하지만 겨울을 지나면 새봄이 온다는 기다림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 ‘따뜻한 봄이 오면’ 이라며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겨울이 다 되어야 솔이 푸른 줄 안다’는 속담이 있듯이 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나기를 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곧 세상일에는 다 일정한 순서가 있는 것이니 순리를 억지로 거스르지 말라는 말이다. 계절이 순리대로 오듯이 겨울나기는 겨울철의 순리이자 봄을 맞기 위한 잔치이다. 글ㆍ김명자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명예교수, 문화재위원 사진ㆍ국립민속박물관, 연합콘텐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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